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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아웃 극복을 위한 복기

바둑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그로부터 유래된 단어는 간혹 일상에서 사용하곤 한다.
바둑 용어 중에 복기라는 말이 있다.
대국이 끝나고 승패가 결정되었음에도 내용을 검토하기 위해 상호 간 처음부터 두었던 순서대로 다시 두어 재연함 뜻하는 단어다.
복기로부터 바둑 기사들은 대국에서 잘한 수와 잘못했던 수, 상대방의 전략 등을 살펴본다.
프로 9단 바둑기사 이창호는 다음과 같이 말할 정도로 복기를 중요시 했다고 한다.

승리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습관을 만들어주고, 패배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준비를 만들어준다

조훈현 9단 또한 복기가 가지않았던 길을 갈 수 있게 한다 하였으며, 패배로 인해 아플수록 더 예민하게 들여다보고 복기해야한다는 말을 했더랬다.
이 바둑기사들이 많은 수를 순서대로 기억하여 복기를 할 수 있는 이유는 한 수 한 수에 집중하고 의미를 부여하여 두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IT분야에서도 복기와 유사한 의미로 쓰이는 회고(Retrospective)라는 용어가 있다.
스프린트라는 일정 주기 후에 회고를 통해 달성 지표가 얼마나 되는지, 잘한 점과 잘하지 못한 점은 무엇인지, 이를 통해 개선해야 할 점은 무엇인지를 되짚는다.
이렇듯, 복기와 회고는 앞으로 더 나은 방향으로 가기 위해, 그리고 그에 있어 최선을 다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다.


Burn out

최근에 심각하게 번아웃이 왔다.
그것은 꽤 오랜 시간 지속되었고, 지금이야 번아웃에서부터 수면 위로 많이 올라온 상태지만, 아직까지도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다.
이전에는 아예 가라앉아 있던 상태에서 이렇게 글까지 쓸 수 있을 정도니 장족의 발전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도 번아웃에서 완전히 벗어났기에 쓰는 것이 아니라, 이로부터 극복하고자 함이다.
번아웃으로부터 벗어나고 이전보다 더 나은 길을 가기 위해 번아웃에 대한 복기를 하고자 한다.

사실 번아웃이 온 것을 깨닫기 전부터 이에 대한 징조는 계속해서 있었다.
다만, 스스로를 괜찮다고 억지로 다독여오며 무리를 해왔다.
번아웃을 이겨내지 못한 결정적 계기는 다름아닌 건강의 악화였다.
몸에 심각하게 반응이 오자, 결국 내시경 검사를 받기로 했다.
검사 후 수면마취로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간호사가 나에게 다행이라고 말했다.
다행히 별일은 없었나보다라고 생각한 순간, 간호사가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다행이라는 말은 지금이라도 검사를 받으셔서 다행이라는 말이에요.
더 늦으셨으면 정말 심각해졌을 수도 있어요. 조직검사를 기다려봐야겠지만, 최악은 면한 것 같아요.

순간 정신이 아득했다.
검사를 받기는 했지만, 설마 이상이야 있겠어 하는 생각이었는데 설마가 사람잡는다.
며칠 후, 나에게 역류성 식도염, 미란성 위염1, 십이지장궤양, 장상피화생2 등이 있다는 판정을 받았다.
허탈감이 몰려왔다.
열심히 달렸던 것의 결과가 건강 악화라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떤 것을 해야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3
정신도 이미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상태였고, 모든 것이 만신창이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여지껏 열심히 해온 덕에 대학원 연구실에는 일을 하지 않고 휴식을 하는 것으로 잘 이야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휴식을 하면서 처음에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어떤 의욕도 나지 않았고, 할 생각도 없었다.
조금 생각을 해보았다.
식습관과 생활패턴의 문제도 있었겠으나, 역시 몸과 정신을 상하게한 주 원인은 스트레스였다.
나는 나름대로의 확고한 규칙과 기준을 가지고 있으며, 누군가가 이를 흔들 때 정신적으로 많이 흔들리는 편이다.
일과 공부를 과중하게 한 탓도 있지만, 이는 부가적인 문제였다.
또한, 나는 나의 감정이나 정신 상태를 잘 깨닫지 못하는 편이다.
상태의 변화가 타인의 눈에도 잘 띄지 않고,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상해가다 다 곪아서야 알아차리게 된다.

번아웃은 시간이 지나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고, 아무리 무언가 하려고 시도해봐도 이입이 되지 않고 하기가 싫어졌다.4
거의 유일했던 취미인 여행도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마땅한 취미생활도 없었다.
글을 써보려 했지만, 그럴수록 글을 쓰는 행위조차 싫어지게 되었다.
꼭 일을 해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꾸역꾸역 해내긴 했지만, 이에 다시 스트레스를 받고 그 반동으로 번아웃이 가중되었다.


여행을 하며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2018년 1월 1일 마추픽추.

모든 생활 패턴을 뒤엎고 처음부터 재구성해야한다고 느꼈다.
우선, 원체 만성적으로 앓고 있던 잔병이 많았기에 이것들을 먼저 치료하기로 했다.
만성 질병들이 시너지로 나를 더 방해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위장에 대한 건강도 회복해야했기에 온갖 병원이란 병원은 다 찾아다녔다.
비염 수술을 하고, 한약을 먹고, 도수 치료를 받았다.
정신과에도 다니며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아침형 인간이 되기 위해 일찍 일어나 조깅을 했고, 건강한 음식을 챙겨먹으며, 술과 담배, 커피를 모두 끊었다.5
위 노력으로 인해 건강이 많이 호전되고 조금은 의욕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내가 당장 관리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이며, 조금이라도 소홀해지면 아직도 몸이 상하고 있는 것이 와닿는다.

스스로를 많이 끌어올릴 수 있게 된 계기는 나에게 동기부여를 하기 위함이 아니라 예상 외로 여자친구에게 조언을 해주면서였다.
한참,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은 여자친구는 궂은 회사 일로 많이 힘들어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서 여자친구와 많은 대화를 했고 특히, 나는 여자친구에게 자존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
여러 말이 있었지만, 최종적인 요점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더라도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말고 보듬어주어야 한다, 나마저 나를 탓하면 아무도 나를 치유할 수 없다였다.
이 말을 하던 도중 나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살면서 거의 느껴보지 못한 어떤 행복한 감정이 분비되었던 것이다.
내가 여자친구에게 해준 말은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혼자 고민할 때에는 이를 찾지 못하다가, 오히려 타인에게 조언을 함으로 나 자신에 대한 정립을 하게 되었다.
또한 이후에, 운이 좋게도 즐겨보던 유튜브 채널인 알간지Alganzi1분과학에서 위와 비슷한 말을 하였고, 정립을 더 굳힐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나름대로는 해야할 일을 정립해서 하나씩 해나갈 수 있는 수준이 되고 있다.
이전에 비해 지금의 달라진 점은 공부를 하다가 집중력이 많이 떨어지면 그냥 하지 않기로 한 것과, 나의 몸을 더 신경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어떤 확고한 목표가 있었고 이에 대한 무조건적으로 목표지향적인 삶을 추구했다면, 지금은 목표보다는 나의 삶을 우선 순위로 두고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

여전히 목표지향적인 삶은 나에게 있어 중요하며 잃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더 이상 무리하고 스스로를 혹사시키고 싶지도 않다.
이 둘을 조절하며 절충하는 것은 아직까지 나의 숙제로 남아있다.
지금 이 글을 쓰며 나의 번아웃 과정을 복기하는 것도 이 둘을 맞춰나가기 위한 방법 중 하나이다.
내가 벼랑 끝에 내몰렸을 때, 항상 이겨내고 성장을 해왔다.
좋다고 해야할지 나쁘다고 해야할지 잘 모르겠지만, 고통을 이겨냈을 때 더 성숙하고 견고해진다.
나는 결국에 또 나아갈 것이다.


[1] 피부, 점막의 표피가 박리되어 진피나 점막하조직이 벗겨져 노출되는 정도의 위염이다.
[2] 위의 점막을 이루는 세포가 장에 있는 세포로 바뀌어 위의 점막이 마치 장의 점막과 유사하게 변하여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장상피화생은 위에 염증이 생기고 다시 회복되는 일을 반복하며 생기게 되며, 위암 발생의 위험요소이다.
[3] 내가 겪은 번아웃의 1단계
[4] 내가 겪은 번아웃의 2단계
[5] 위 세가지를 모두 끊은지 반년이 조금 넘은 지금은 가끔 맥주 한 잔 정도는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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